거지들
수필가 박 성 희
“배가 고파 죽겠어.”
“우리 아기 살려줘.”
늙은 거지가 한 푼만 달란다. 어린애를 안은 엄마 거지가 몇 끼를 쫄쫄 굶었다고 손을 내민다. 차 창문을 두드리며 말할 기운도 없는지 몸짓으로 애원을 한다.
첸나이 시내로 가는 길에 잠깐이라도 차가 정체되면 금세 어디서 나타났는지 거지들이 돈을 달라고 야단이다. 나는 주저 없이 몇 루피 쥐어준다. 백 루피를 주다가, 오십 루피를 주다가, 삼십 루피를 준다. 그마저 없을 땐 동전 몇 닢이라도 준다. 십 루피면 우유가 들어간 과자 한 봉을 사먹을 수 있고, 이십 루피면 손바닥만 한 빵 두 개를 사먹을 수 있고, 삼십 루피면 한 끼 밥을 배부르게 사먹을 수 있다. 대부분 행색이 남루한 늙은 거지들이거나 아기엄마 거지들이다. 늙었기 때문에, 애가 있어서, 어디 가서 돈을 벌수도 없고, 불가촉천민이기 때문에 일생 힘들게 살아갈 것이다. 젊은 거지들은 눈치라도 있어서 창문 가리개를 팔거나, 장난감을 팔거나, 공책을 파는데, 나는 그냥 물건은 받지 않고 몇 루피를 주고 만다.
세상 뭣 모르고 태어난 거지들의 어린자식들. 하필이면 카스트 중에 가장 천한 불가촉천민의 몸이라니. 죽었다 깨어나도 변치 않을 세습. 이 무슨 불평등한 악법인가. 얼마나 기막히고 억울한 삶인가. 옷은 쓰레기장에서 주워 입고, 잠은 아무데서 자고, 평생을 구걸해서 먹고 살아야하는 떠돌이 팔자. 그것이 그들 한 생의 이유다. 거지들의 긴 머리는 지푸라기 같고, 옷은 너덜너덜, 피골이 상접한 검은 얼굴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 웃음이 없다. 기쁨이 없다. 감사함이 없다. 왜 사는지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 같다. 태어났으니 그냥 바람처럼 먼지처럼 굴러굴러 산다. 하지만 누군들 떵떵거리고, 꿈을 꾸며, 행복한 삶을 살고 싶지 않으랴. 누군들 궁전 같은 집에서, 배불리 먹고, 왕처럼은 아니어도 희희낙락한 삶을 살고 싶지 않으랴. 그저 그런 것들은 멀리 있는 것처럼, 이미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일찌감치 포기하고 동떨어진 삶을 산다.
어렸을 때 우리 동네에는 거지 집 한 채가 있었다. 떠돌이 거지들과 아기를 낳고 사는 부부거지가 살았다. 밥상을 차릴 때쯤이면 그들은 꼭 깡통과 바가지를 들고 나타나 밥을 얻으러 오곤 했다. 엄마는 그런 거지들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는지 매번 깡통에 밥을 주고 바가지에 국을 떠줘 보냈다. 그때마다 그네들은 함박웃음을 짓고 몇 번이고 허리 굽혀 인사를 했다. 할아버지는 내 집에 온 사람들에겐 절대로 그냥 보내지 말도록 했다. 지나가는 떠돌이들에게도 밥을 먹이도록 하고, 더러는 옷도 주고 고구마 감자 같은 먹을거리를 퍼주기도 했다.
나는 굶주린 사람들을 보면 밥 한 끼 사주고 싶다. 안 입는 옷 챙겨주고 싶다.
한국의 전철역 입구에는 신체 멀쩡한 젊은 거지들이 가만히 앉아서 돈을 달란다. 나는 이런 거지들에겐 절대 돈을 주지 않는다. ‘개미와 베짱이’중에 베짱이에게 돈을 준다는 건 죄악이다. 내 남편이 새벽부터 다시 새벽까지 쉬지 않고 골 빠지게 일한 대가를 놀고먹는 자에게 준다는 건 사치다.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남의 돈을 거저먹겠다는 건 어이없다. 카스트 없는 나라에서 둘러보면 얼마든지 돈을 벌수 있는데 뻔뻔하게 구걸을 한다.
인도의 인도는 깜깜한 밤이 되면 집 없는 자, 굶주린 자, 돈 없는 자들의 집이 되고 안식처가 된다. 자유롭게 길가 아무데나 누워 잠을 잔다. 우글대는 모기에 뜯기고, 쓰레기에 치이고. 온가족이 자기도 하고, 방랑자들이 자기도 하고, 어린애 늙은이 할 것 없이 길게 흩어져 잔다. 바나나 잎으로 엮은 움막조차 없는 사람들, 땅 한 평 없는 사람들이다. 제 의식주조차 해결을 못하니 어디서나 천대와 멸시뿐. 위험하고 소외된 삶을 하루하루 간신히 산다. 나는 잠시 집에 쌀이 떨어지고, 수중에 돈이 떨어지고, 한 끼만 굶어도 불안한데, 이들은 일생을 그렇게 산다.
힌두교, 불교문화에서는 사회의 불안 세력인 거지들이 당당하게 행세하기도 한다. 거지들에게 적선한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좋은 업을 쌓는 기회를 주는 것이며, 선행을 통해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므로 오히려 돈을 줄 수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할 일이라고. 어쩐지 많은 거지들은 돈을 줘도 감사해 하지 않는다. 이들은 진정 거리의 구원자인가.
나의 거지의 기준은 돈이 많으면서 불쌍한 자에게 베풀지 못하는 자, 피땀의 대가를 적정 쳐주지 않는 고용주, 비리를 일삼는 자, 부모 형제간에 정을 나눌 줄 모르고‘혼자서만 잘 먹고 잘사는 비정한 자’다. 돈 없는 자가 아니라, 정 없는 자다. (2014. 6. 6.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