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마지막 밤
박 성 희
시월, 바람이 분다. 햇살이 따갑다.
바람은 나뭇가지와 내 머리칼을 후비고, 햇살은 과일과 곡식의 마지막 단맛을 위해 따갑게 쏜다. 하늘을 본다. 새파랗다. 두둥실 구름떼가 여러가지 모양을 만들며 놀고 있다.
나는 이 천국 같은 계절, 시월이 좋다. 소녀시절에는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노란색과 보라색 들국화의 짙은 냄새에 빠져 있기를 좋아했고, 개울가 미루나무 가로수 길 거닐기를 좋아했고, 갈대숲을 헤치고 노란 은행나무 아래 발랑 누워 사색에 잠기길 좋아했다.
이 계절은 언제나 나에게 외로움과 그리움을 준다. 열여섯 소녀시절부터 나는 이 무자비한 외로움과 그리움에 못 이겨 편지를 쓰곤 했다. 가을의 절정기이며 내 감수성의 절정인 시월의 마지막 밤마다 미지의 소년, 그에게 편지를 썼다.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나의 한쪽에게 길고 긴 편지를 썼다.
편지지를 풀로 붙여 잇고 이어서 뱀처럼 길게 만들고, 잉크에 펜촉을 담그며 또박 또박 편지를 썼다. 그 날 밤, 창밖에는 하얀 반달과 초록별이 쓸쓸히 떴고, 내 방에는 붉은 촛불이 암담하게 펄럭였다.
낮에 주워 온 빨강, 노랑, 주황, 갈색 단풍잎을 편지지에 붙이고, 들국화꽃을 꾹꾹 찍으며 내 달뜬 슬픔을 달랬다. 이름도 얼굴도 아무것도 모르는 미지의 소년에게 온 밤을 새며 편지를 썼다. 초는 어느새 촛농으로 범벅이 되고, 내 긴 편지글은 깨알같이 수놓아져 있었다. 소녀의 한숨과 눈물방울이 맺히기도 했다.
스산한 바람소리를, 낙엽 떨어지는 소리를, 피 토하며 우는 소쩍새의 울음을, 밤새도록 잠 못 들고 뒤척이는 한 소녀의 탄식을, 마음 가누지 못하고 헤매는 혼란스러움을, 시를 읽어도 눈은 아주 먼 데 가 있는 어떤 소녀를 아느냐고.
누가 받아주지 않아도 좋았다. 누가 읽어주지 않아도 좋았다. 누가 사랑해주지 않아도 좋았다. 그냥 그대로 나 홀로 좋았다. 외로워서 좋았고, 그리워서 좋았다. 나만의 적막함이 좋았다. 시월의 마지막 밤을 향유하는 자체가 좋았다.
매년 가을은 돌아왔고, 하늘연달 시월의 마지막 밤도 돌아왔다. 미지의 소년에게 편지를 쓴 세월들이 거듭될수록, 이제는 만나고 싶다, 보고 싶다, 이야기 하고 싶다는 생각이 절절해져 갔다. 누군가 나의 애인이 되는 날, 나는 그에게 그 편지를 주리라.
미지의 소년, 시월이면 언제나 느닷없이 내 가슴속에서 그가 나를 향해 손짓한다. 그에게 달려간다. 민감한 소녀가 된다. 그는 언제까지나 내 처연한 외로움이며, 사무치는 그리움이며, 부치지 못하는 애달픈 편지다.
시월이 하루하루 지나간다. 내 젊은 날도 지나간다. 오늘이 지나간다.
바람이 내 몸속으로 점점 날카롭게 쳐들어온다. 감정도 바람에 베인다. 많이 쓰리다. 아프다.
수북이 쌓인 낙엽을 자각자각 밟으며, 산 중턱 어딘가에 있는 카페에 가고 싶다. 그곳에서 슬픈 곡조의 음악을 들으며, 나쁜 커피를 한잔 마시고 싶다. 서럽게 떠돌아다니는 방황의 날들을 이제는 정리하고 싶다. 처절한 고독도 그 쓸쓸한 공간에 꼭꼭 가두고 싶다.
그리고, 그를 만나고 싶다.
ebs수필콘서트에 방송됨 https://youtu.be/vaZQPsY6Z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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