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사랑에세이집 [ 나에게 마법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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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첫눈, 첫눈에 반해

연지아씨/박성희 2013. 4. 12. 13:52
 

      첫눈, 첫눈에 반해 수필가 박성희 사랑이 올까. 내게도 사랑이 오기나 할까. 시간은 바람처럼 지나갔고, 몇 번의 계절이 바뀌었다. 그리곤 곧, 설레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하루가 다가왔다. 수줍은 분홍빛 그리움이 내게 달려와 있었다. 가슴이 뛴다. 떨린다. 밤새도록 잠 못 들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고 있다. 칠흑 같은 밤하늘엔 차가운 별 몇 개만 흐릿하게 떠 있다. 내일이면 그를 만나러간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내 마음 속의 그를 보러 간다. 이른 아침, 창문을 여니 하얀 첫눈이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우리의 첫 만남을 축복이라도 하듯, 동요속의 하늘나라 선녀님들이 하얀 떡가루를, 하얀 눈꽃송이를 자꾸 자꾸 뿌려 주고 있다. 세수 하고, 머리 감고, 얼굴에 스킨과 로션도 발랐다. 오늘따라 머리핀은 잘 꽂아지지 않고, 옷도 매치가 안 된다. 빨간 스웨터에 청치마를 입는다. 자꾸 거울을 본다. 시간만 간다. 마음이 급해진다. 버스는 오지 않는다. 눈 때문에 늦어지는지, 한참 후 버스가 와서 곤지암 터미널에 닿았다. 첫눈 치고는 쌓이는 눈이어서 모든 차들이 지체 되고 있다. 약속장소로 가기위해 모란행 직행버스를 기다리는데 또 안 온다. 시간만 간다. 약속시간 2시간이 휙 지났다. 간신히 차를 탔는데, 눈길이니 마냥 거북이다. 그가 첫 답장으로 직접 만들어 보낸 크리스마스카드의 특이한 냄새, 몇 년 간 주고받았던 애틋한 편지들, 화이트데이 때 준 I love you 라고 써진 뿔반지와 무지개 색 사탕 통, 그리고 별 달 구름과 함께한 많은 그리움의 시간들이 주렁주렁 머릿속을 스친다. 약속시간 3시간이나 지나서야 그가 사는 서울과 우리 집 중간 지점인 모란터미널에 도착했다. 만날 장소로 정한 표 파는 곳으로 뛰었다. 가슴이 콩닥거려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서로 얼굴을 알 수가 없어, 나는 증표로 빨간 목도리를 목에 칭칭 감았다. 그는 내가 떠서 보낸 갈색 목도리를 하고 올 것이다. 그를 찾아본다. 사람들이 들붐벼 찾을 수가 없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기다림에 지쳐 그냥 가버렸구나. 이렇게 힘들게 왔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을 그리움으로 견디어왔는데. 보고 싶어 미쳐버릴 것 같았는데. 외로워도 참을 수 있었는데. 그리고, 사랑했는데. 오늘이 아니면 영영 못 만날지도 모르는데. 내일이면 군대에 간다고 해서 그가 만나자고 했다. 군대에 가면 어떻게 될지 몰라서였다. 나도 그를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움과 기다림에 지칠 대로 지친 몇 년이었다. 친구들의 성화로 가요책자 펜팔 난에서 알게 돼, 우린 일주일에 한번, 아니면 한 달에 두세 번 정도 꽃편지를 주고받았다. 시골과 도시라는 서로 다른 세계에의 동경을, 청춘의 꿈과 고민을, 때로는 그리움으로 파도치는 감정을 교류했다. 그 때 나는 열여섯 살 순진한 산골 중학생이었고, 그는 열여덟 살 서울 고등학생이었다. 그리곤 어느새 나는 고3이 되었고, 그는 대학교 2학년이 되었다. 나는 꼼짝 않고 오래도록 서 있었다. 얼마 후,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 친다. 그다! 그가 하얗게 웃으며 서 있었다. 마치 하얀 눈처럼, 사월의 목련나무처럼 그렇게 서 있었다. 언제나 내 마음속에서만 자리했던 그가 청바지에 갈색스웨터차림으로 내 눈앞에서 우뚝 서 있는 것이다. 우리는 길을 걸었다. 서로 어색해 머뭇거리며 길을 걸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에게서 풋풋하고도 상큼한 냄새가 몰려왔다. 아, 바라만 봐도 좋은 사람. 무조건 웃어지게 하는 사람. 사정없이 황홀하게 하는 사람. 거리엔 아직도 하얀 눈발이 안개꽃처럼 날리고 있었다. 그에게도, 나에게도 하얀 안개꽃이 떨어졌다. 좋았다. 따뜻했다. 안도했다. 한참을 걷다가 어느 허름한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엔 크리스마스 트리가 반짝반짝 했고, 캐럴송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우린 서로 마주보고 얌전히 커피를 마셨다. 처음 와 본 카페에서, 처음 마셔보는 커피. 쓰다. 그가 설탕을 넣어준다. 그가 갈색 목도리를 해서인 지 커피와 닮았다. 그가 나를 쳐다본다. 쑥스럽다. 눈을 어디다 두어야할지 모르겠다. 우리는 많은 말을 하지 않고, 쳐다만 봤다. 한참을 웃음 띤 얼굴로 쳐다만 봤다.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어둑해질 무렵, 우린 곤지암 행 버스를 타고 내가 다니는 학교로 향했다. 그와 난 앙상한 겨울나무가 즐비한 교정을 또 걸었다. 그의 기다랗고 하얀 손이 내손을 잡는다. 가만히 있었다. 온기가 전해진다. 한편으론 꽃 같고, 꿈같은 이 시간이 처음이자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시리기도 했다. “나, 내일 군대 가. 기다려줄 수 있어?” “...... .” 첫눈에 반한 그의 이름, 그의 편지, 그의 선물, 그의 음성, 그의 눈빛, 그의 모습, 그의 분위기, 그의 모든 것. 언제나 마음이 외로웠던 난, 그런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무, 돌, 꽃, 새들만이 내 마음의 비밀을 알아주던 내게, 다정다감하게 내 마음을 읽어주고 귀 기울여 준 그를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첫눈이 내리는 날, 첫눈에 반해버린 내 첫사랑 그가 하얀 눈에 살포시 포개진다. 군사우편 찍힌 그의 첫 편지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죽겠어."
출처 : 그때 그렇게 떠나
글쓴이 : 天弓 유성룡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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