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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구슬이 쏟아지는 겨울바다에서 박 성 희
불현듯, 바다가 보고 싶었어. 나는 무작정 바다로 향했지. 나를 실은 고속버스는 밤새 달렸어. 스산함이 밀려오는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일 것 같았지. 속초, 바다에 닿았을 때는, 아직 여명이 시작 되지 않아 새벽별이 깜박였어. 바다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길게 늘어진 철조망을 한참 지나야 했어. 철통같은 경계태세인 바다였지. 나는 가시철조망 사이로 조각 난 바다를 보며 걸었어. 뚜벅뚜벅, 발자국 소리가 들려. 누군가가 내 뒤를 따라 오고 있어. 흘깃 뒤돌아 봤지. 총을 들고 있어. 까만 얼굴에 푸른색 군복과 같은 물감이 칠해져 있네. 베레모를 쓴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득여. 입술은 경직 돼 있어. 나는 다시 걸었지. “거기, 서!” “?” 땅! 하고 나를 쏠 것 같아. 순간 내 몸은 얼었고, 물구슬 같은 눈물이 핑그르 돌았어. 무서워. 총을 든 두 손 뒤로 줄줄이 박혀있는 총알이 옆구리에 달려있어. 나는 그를 노려봤어. 경직됐던 그의 입술이 삐죽 벌어졌어. 하얀 입김을 뿜으며 웃었어. “기다려. 외출 허가 받고 올게.” 그가 멋대로 한마디 던지고 쏜살같이 사라졌어. 곧, 그는 깨끗한 제복차림으로 내게 달려왔지. 나의 하루 애인이 되어주겠대. 바다의 길을 잘 모르는 나를 안내해 주겠대. 그리곤, 내 손을 잡고 철조망이 쳐져 있지 않은 바다로, 바다로 달려갔어. 아, 해가 떠오르고 있어. 눈이 부셔. 뜨거운 불덩어리가 수평선 위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며 세상을 환하게 밝히고 있어. 활기가 솟구치는 새벽, 아침. 바다는 차갑고 육중했어. 거칠게 숨 쉬고 있었지. 바다가 숨을 들이켜고 내 쉴 때마다, 물결들이 출렁이며 금빛 은빛으로 반짝여. 햇볕은 토막토막 잘게 잘려져 나가고. 바다는 거대한 덩어리를 꿈트럭대며 몸부림쳐댔어. 그때마다 차알싹 차알싹 파도가 쳤고, 하얀 포말이 잘게 부서져 내리며, 후두둑 후두두둑 금빛 은빛 물구슬들이 수없이 쏟아져 내렸지. 바다가 만들어준 그 차갑고 땡글땡글한 물구슬들. 그 물구슬들은 어느새 그와 나의 하반신을 적셔버렸어. 우리는 쏟아지는 물구슬들의 세례를 받으며 바다를 걸었지. 배릿한 바다 냄새를 맡으면서 말이야. 그는 나를 바닷가 모래톱 위에 눕혔어. 그도 누웠지. 얼어버린 모래알 위로 설익은 햇살이 내리네. 물새들은 휘황한 공중에서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물고기들은 저 바다 속에서 지느러미를 팔랑이며 유영할거야. 뿌웅, 멀리서 묵직한 뱃고동 소리가 들려. 그래, 바다는 언제나 이렇게 역동의 덩어리야. 지금 이 바다는 내게 태평양이며 지중해 같아. 온통 끝없는 바다만 보여. 맨 바다만. 나는 꿈꾸듯 취해있어. 그는 며칠 후면 제대를 해서 이 바다를 볼 수 없을 거래. 교대하러 가다가 나를 본 거고, 처음이자 마지막 한나절 외출을 한 거래. 후, 하고 한숨을 쉬네. 나도 한숨을 쉬었지. 노래를 불러주겠대. ‘너에게 있던 모든 괴로움들은 파도에 던져버려 잊어버리고, 허탈한 마음으로 하늘을 보라. 너무나 아름다운 곳을.’ 푸른하늘의 겨울바다부터 주문하는 노래를 전부 불러주네. 햇살이 빨갛게 농익을 때까지. 나는 온 종일 그가 목청껏 외치며 부르는 노래를 들었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꽤 핸섬하네. 쓸쓸해 보이면서도 시퍼런 젊음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팔딱거려. 찬 공기로 그의 입술에선 연신 하얀 입김이 풀풀 날렸고, 내 머리카락은 칼바람에 사납게 베었어. 겨울바다는, 온통 그의 노래 소리와, 찰찰찰찰찰 물구슬 쏟아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지. 그리곤 이내 그 소리들은 공중으로 날아가 버렸어. 모래톱으로 물거품 되어 꺼져 버렸어. 눈물인 듯 씻겨 지워져 버렸어. 파도에 밀려 사라져 버렸어. 그리움도 쓰러져버렸어. 나쁜 기억도 잊혀져 버렸어.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다시 꿈을 꾸어야겠어. 거침없이 출렁이는 파도를 봐. 멈추지 않고 반복하는 물새의 날갯짓을. 끊임없이 쏟아지는 물구슬들을.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저 바다를. 내 꿈도 바다의 생명처럼 살아나고 있어. 꿈틀대고 있어. 그는 내게 행복했었노라고 인사하고 귀대했어. 모두 본분에 충실하고 있어. 그래야만하나 봐. 어디선가 그가 불러준 노래 소리가 들려와. ‘이 세상에 그 누가 부러울까요. 나는 지금 행복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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