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문학은 영상화를 전제로 영상을 지향하는 문학이며, 영상화된 문학으로, 영화를 문학텍스트의 확장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영상에세이는 영상화를 지향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영상에세이는 문학의 성격과 영상의 성격을 공유하고 있다. 문자모드가 영상모드로 바뀌는 과정을 통해 그 결과물이 문학외적 독자수용미학에 효율성을 인정받을 때 영상에세이는 설득력을 갖게 될 것이 분명하다"
영상에세이의 가능지표와 기타 인간구원 - 유한근
1. 영상에세이의 가능지표
영화산업의 발달로 인한 대중의 관심이 영화에 쏠린 지 오래다. 인쇄체 문화에서 영상매체시대로 도래되었다는 의식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문학의 상업적인 측면에서의 쇠퇴로 인해 출판계와 언론계는 문학 작품의 대중적인 보급과 상업적인 판매를 위해 ‘영상문학’이라는 용어를 오래전부터 사용해 왔다. ‘영상문학’은 학문적 용어가 아니라 저널리즘적인 용어이다. TV에서나 신문, 잡지 등에서 영상소설이나 영상시란 말이 종종 사용되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상징과 은유성으로 문학성이 높은 영화에 대해 ‘영상시’라는 수식어를 달며 사용되었던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영상문학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지만 연구는 확립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그것이 영상문학에 대한 학문적 연구 가치가 없기 때문인지 혹은 문학과 영상의 학제간 연구의 어려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부의 한시적 관심만 있었을 뿐 문학의 한 장르로서 정착되고 있지는 못하고 있다.
그동안 ‘영상문학’이라는 용어는 다양하게 규정되어 쓰이고 있었다. 혹자는 “영상문학에는 영상미를 극대화시킨 문학, 영상화를 위한 문학, 문학성이 강한 영화 등의 의미가 담겨 있다.”라고 김성곤 교수는 ‘영화제작을 염두에 두고 쓴 소설, 다시 말해 시나리오와 흡사한 소설을 영상소설’ 혹은 ‘스튜디오 소설’로 영상소설의 개념을 정리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영상소설을 시나리오로 보지는 않는 것처럼 영상문학을 ‘문학적인 영화’로 보지 않고, 오히려 영상미를 극대화한 영상적 요소를 수용한 문학으로 그 개념을 정리한다. 졸작 <문학과 문화콘텐츠>(월간문학에 발표)에서도 개진한 바 있지만, “문학의 장르적 특성을 유지하며 영상적인 제 요소를 차용한 문학을 영상문학으로 규정한다. 물론 문학 장르의 해체는 이미 시작되었고 퓨전문학적 양식의 작품들이 앞으로 좀 더 많이 나올 것으로 예상되지만 영상시대 또는 정보화 시회에 대응하는 문학의 유일한 대안으로 영상문학”을 내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요컨대, 영상문학을 문학의 하나의 장르적인 문학으로 영상적인 제 요소들을 차용하여 영상성을 가미하는 한편 문학의 역동성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상에세이는 기존의 수필에 영상적 요소를 첨가한 것을 의미할 것이다.
수필문학이라는 문자모드를 영상모드로 바꾼 에세이를 의미할 것이다. 문자모드를 영상모드로 바꾸는 과정을 내용미학적인 측면과 형식미학적인 측면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 형식미학에서 주목하는 작품이 신창선의 <그렇구나>와 노혜숙의 <오래된 풍경>이다.
신창선의 <그렇구나>는 2012 부산비엔날레 ‘배움의 정원’ 미술관을 관람하고 ‘미학적 체험’을 쓴 수필이다. ‘레바rebar41’ ‘NO.18’ ‘진혼’ ‘오데사 계단’ ‘분재’ ‘응겐-푸타 윈클’ 등의 작품을 오브제로 하여 그 시각적 감상체험을 문자모드로 옮긴 수필이다. 시각적인 영상모드를 문자모드로 바꾼 글을 영상문학이라고 불려도 좋다고 한다면 <그렇구나>는 영상에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구성적인 측면에서 보면 영화의 ‘숏’에 해당되는 6개의 오브제를 가운데에 놓고 서두와 결말을 액자 속에 넣고 있는 구성미학을 취한다. 아래의 인용문이 서두와 결말 부분이다.
비오는 날, 건물 입구 사물함에 우산을 보관해 두듯이 ‘배움의 정원’ 미술관에 들어서기전에 자기-동일성이라는 개념을 버리라는 총감독 로저 뷔르겔의 말을 이리저리 쥐집어 본다.
그렇더라도 안개에 싸여 있는 이곳에서, 작가의 언어에 내 감성이 고문당하지나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나름대로의 미학적 체험을 하기로 한다. (……)
난해한 몇몇 작품은 끝내 나를 안개 속 ‘배움의 정원’을 걷게 하고 있다. 반세기 전, 화가이자 조각가인 뒤샹이 화장실 변기를 미술 전시회장에 <샘>이라는 제목으로 출품했을 때 사람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그 이후 팝아트, 미니멀리즘, 설치 미술 등으로 전개되는 작품활동 자체가 철학적 사유활동을 요구하는지도 모르겠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한 올을 붙드는 일은 자신의 편견을 지우는 일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겠다.
사실보다는 보여주는 그 무엇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일은 자신의 틀, 사회의 틀을 깨는 게 시작이요,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든다. 투박하고 고통스런 현실이 아름다운 예술로 꽃피고 있다고 말을 해도 될는지 모르겠다. 정작 내 자신은 그 뜻을 모르면서도.
-신창선의 <그렇구나> 결말부분
제1오브제 ‘레바rebar41’는 “자연의 힘의 무서움을, 인간의 탐욕을 냉소적으로 질타”하는 작품으로 인식하고, ‘NO.18’는 부산 “최초의 도시재개발 사업의 결과인 좌천아파트”를 통해 한국 전통 가옥의 미학적 건축 구조가 무엇인가를 되묻는 작품으로 작가는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진혼’은 해고노동자의 작업화 수백 켤레를 원으로 놓고, 그 사이에 색색의 종이꽃을 장식한 작품을 통해서 쌍동자동차 노동자 스물두 명의 죽음을 애도하는 진혼의 의미를 환기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노동자의 혼과 고통이 담겨 있는 작업화는 노동의 상징이고, 노동의 신성성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라고 파악한다.
‘오데사 계단’는 에이젠슈타인의 영화 <전함 포테킨>에 나오는 유명한 오데사 계단을 비참한 전쟁의 참상을 표상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한국전쟁의 떠올린다. ‘분재’는 “식물을 규율하고 있는 장치와 그 속의 분재를 미니어처로 재창조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고, “비틀어진 분재가 사람 마음을 충만하게 한다”는 “지독한(?) 아이러니”임을 인식한다. ‘응겐-푸타 윈클’은 칠레 원주민 마푸체족의 화산석을 오브제로 한 설치미술작품을 통해”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하는 철학적 사유를 복습” 하고 있음을 토로한다.
그리고, 위에 인용한 결말 부분에서 보듯이 “편견을 지우는 일”과 “사실보다는 보여주는 그 무엇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일은 자신의 틀, 사회의 틀을 깨는 게 시작이요, 마지막”이라는 인식하게 되었음을 토로한다.
이 수필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2012 부산비엔날레 미술관에 설치된 작품에 대한 정보를 알아야 하며, 하나하나의 작품에 대한 배경 지식도 필요하다. 그리고 작가의 디테일한 설명이 좀 더 요구되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작가에게 그것을 요구하기 보다는 그 작품에 대한 세세한 묘사나 느낌을 감성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일상적인 체험과 연결시켜 주었으며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 수필을 이해하기 위한 배경지식은 독자의 몫이라 할 수 있다. 작가가 좀 더 친절했으면 하는 바람을 독자는 가질 수 있지만 작품의 오브제에 대한 지식의 욕구는 독자가 성취해야 한다.
하지만, 이 수필의 제재를 독자들에게 감동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영상에세이가 지녀야 하는 표현구조에서 디테일한 묘사와 작가의 생동감 있는 삶의 체험이 녹아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판단이 든다. 이것이 영상에세이의 가능지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른 영상에세이라 분류할 수 있는 노혜숙의 <오래된 풍경>을 보자.
‘풍경은 자기 안의 상처를 경유하면서 해석된다.’고 하던가. 그럴지도 모른다. 풍경 속에서 떠올리는 것들은 대개 자기 안의 익숙한 어떤 것들이다. 자라면서 독특하게 기호화된 정서들은 어떤 풍경과 접촉하면서 순간적으로 발화한다. 돌아오지 않는 것들일수록 흡인력은 강하고, 그렇게 재생되면서 추억은 굳건하게 내장되어가는 것일 게다. (……)
잃어버린 시간 속으로
오래된 풍경 속에서 내가 만나는 것은 결국 나의 흔적들이다. 잊힌 채 잠들어 있던 내 안의 기억들이다. ‘기억이 없으면 나도 없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낡은 풍경 속에서 풀려나온 기억의 한 끄트머리가 풍화된 추억을 재현해낼 때 나는 오롯이 잃어버린 시간과 재회한다. 회억의 정서란 다분히 낭만 일색이기 쉽지만 때론 외면하고 싶은 상처와의 화해의 대면이기도 하다. 굳이 기쁨이 아닌들 어떠랴. 나는 가끔 그 풍경들과 만나고 싶다. 그리고 마침내 그 풍경과 하나가 되어도 좋겠다.
-노혜숙의 <오래된 풍경> 서두와 결말
노혜숙의 <오래된 풍경>은 작가의 기억 속에 ‘흑백사진’처럼 남아있는 하나의 ‘숏’을 끌어내어 병렬로 구조해 놓은 수필이다. 하나의 ‘숏’인 ‘갈매기다방’은 서해 작은 포구인 한진의 갈매기다방의 내부 풍경과 그 속의 한 여자를 통해서 작가 자신의 내면에 지문처럼 남아 있는 자신의 모습과 ‘정감 넘치는 풍경’ ‘12월의 마른 눈’의 서정과 서경을 환기한다. 그리고 ‘순덕할머니의 가을’은 독거노인에게 면사무소에서 주는 정부미와 반찬으로 외롭게 사는 시골 할머니의 기다림의 풍경을 작가 자신의 어머니와 몽타주 기법로 조응시켜 모친을 환기하는 숏이다. 어머니에 대한 에피소드나 서술이 없지만, 순덕할머니의 영상으로, 그리고 “마당가 늙은 밤나무 쭈그렁 밤송이 하나, 제풀에 툭 떨어진다”는 감성적인 끝 문장으로 작가의 마음을 충분히 그리고 있다. 이것이 영상적인 요소를 수필에 차용해서 쓰는 영상에세이의 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웃음’은 사진작가 이형록의 <우리 집>이라는 흑백 사진을 통해 작가 지신의 유년의 모습과 마음을 들여다본다. 흑백사진을 보는 것처럼 그 사진을 통해 작가의 모습과 마음을 다 볼 수 있는 것처럼 묘사가 디테일하다. 카메라 렌즈가 1950년 면목동 흙벽돌 집의 외부와 내부를 훑는 것처럼 생생한 느낌을 준다. 그런 뒤 작가는 이 오브제의 끝부분에 “더 이상 우리 집일 수 없는 이 시대 ‘우리’의 부재, 그것의 성찰에서 잃어버린 나의 웃음을 찾을 수 있을까”를 반문한다.
그리고 위의 인용문의 후반부처럼 “기억이 없으면 나도 없다”는 말과 회억은 깊은 상처라 해도 화해이며 기쁨이기 때문에 작가는 “그 풍경들과 만나고 싶”고 “마침내 그 풍경과 하나가 되어도 좋겠다”고 토로한다. 흑백영상에서 보고 느낄 수 있는 감동을 이 수필은 문자모드로 보여주고 있는 영상에세이의 한 지표라 할 수 있다.
2. 기타, 인간구원
우리가 문학의 세부적인 한 장르로 영상문학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문학장르해체시대를 대비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그 본질적인 의도는 진부하고 낯익기 때문에 외면당해 위기를 초래한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모색해보자는 데 있다. 기존으로의 정체를 두려워하고 전복을 해서라도 새로움으로 나아가려는 저의 속에서는 문학인 자신의 구원과 나아가 인간구원에 있다. 인간구원의 문제가 문학의 형식미학 탐색을 통해 가능하다고는 볼 수 없다. 내용미학과 유일(unit)한 모습 속에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직접적으로 실현하는 모티프는 ‘신’의 문제이다.
강여울의 <신神>이 그것이다.
신神은 무엇인가? 연극<눈먼 아비에게 길을 묻다>에서 바보 아버지 이출식의 우문愚問은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출식이 말하는 귀신鬼神은 악귀가 아닌 바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환영이다. 그의 상식으로 사람은 죽으면 귀신이 된다. 그에게 귀신은 악귀惡鬼가 아니라 신神이 된 아버지, 귀신鬼神이다. 자신의 손톱을 깎아주고, 업어주던 따뜻한 느낌으로 기억에 남아 있는 아버지인 것이다. 그가 죽음을 택한 이유도 자신은 살아서는 무력한 아버지지만 죽어 귀신鬼神이 되면 아들의 병을 고쳐 줄 수 있는 신神이 된다고 믿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십자가 아래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놓고 기도한 다음 아버지의 사진을 품에 안고 숨을 거두는 일치의 의식으로 알 수 있다.
성경에 하느님은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만드셨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사람 속에 신성神性성이 들어있다는 말이다. 모든 사람 속에 들어있는 이 신적神的인 부분은 양심良心일 것이다. 어린이와 같이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마음이 신적인 부분이기에 예수님께서도 하늘나라가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어린이와 같은 마음의 바보 이출식의 자살은 비극적이지만 희극적인 자식의 삶을 희망하는 아버지의 장렬한 의식이었다.
-강여울의 <신>에서
위 인용문에 대한 논의는 섣불리 단언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종교적인 관심에서 더욱 더 그러하기 때문에 담론은 위험하다. 이를 전제로 하고 이 수필을 보면, 이 수필은 연극 <눈먼 아비에게 길을 묻다>를 보고 ‘신’에 대한 느낀 점을 편안하게 쓴 수필이다. 영화가 아닌 연극 관람이 작품의 모티브가 된다. 그것을 발전적으로 전개하여 비극적인 자살, 그 죽음이 위의 인용문 마지막 문장처럼 “희극적인 자식의 삶을 희망하는 아버지의 장렬한 의식”임을 인식하는 수필이며, 우리의 내면에 지니고 있는 신성이 살아나면 “이 세상도 아름다운 천국이 될 수 있”고 “우리 모두는 신의 자식”임을 인식한 수필이다. ‘내면의 신성성’은 작가는 양심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불교의 ‘불성’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무엇이라 지칭하든지 간에, 그 성질은 인간구원의 요소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와 맞아야 할 것이다.
나라는 돌을 들여다보았다. 삐죽삐죽 모서리투성이였다. 부대끼며 사느라 깨어진 자리에도 새로운 날이 서 있는 것이 분명했다. 감추려 애썼지만, 어느 순간 튀어나와 들이댔을 내 모서리들, 의식적으로 대들지는 않았을지라도 일방적으로 내달려오는 돌덩이에 고스란히 내 자리를 내어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지 말라고 들이댄 모서리가 더 큰 불협화음을 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 몸 귀퉁이가 깨어져 나갈 때, 상대 역시 아팠으리라. 나처럼 울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소리에 귀 기울이지 못했던 것 같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나라는 돌을 파도치는 바다에 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세상의 중심은 나라는 좁은 소견이 벼리어 놓은 내 마음의 모서리를 거센 파도에 갈고 또 갈아 몽돌이 되고 싶었다.
저만치 숙소 앞에서, 전날 타고 갔던 버스가 그런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껴야 했다. 부처님의 말씀대로 성씨도 사는 곳도 감정도 다르지만, 우리는 자타불이自他不二, 그 버스를 함께 타고 같은 곳으로 가야 할 공동운명체였던 것이다.
-김용순의 <몽돌의 노래>에서
김영순의 <몽돌의 노래>는 단체여행에서 만난 해안의 몽돌을 통해 자아를 인식하고 되돌아보는 수필이다. 작가는 바닷가에서 큰 돌과 몽돌을 만난다. 큰 돌을 밟을 때 나는 소리는 ‘저항의 소리’였지만, 해안가에서 파도에 부딪쳐 내는 몽돌들의 소리는 “하나된 어울림의 소리”이고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신비로운 가락. 마냥 들어도 싫증나지 않고 새롭기만 한 화합의 노래”라고 인식한다.
그리고 위의 인용문처럼 같이 여행하게 된 타인에 대한 불편함. 한 버스에 탄다는 행위는 “서로에게 자유와 실존을 박탈하는” 행위로 인식한 자신의 잘못임을 깨닫게 한다. 우리 모두는 ‘자타불이’라는 것을 몽돌은 깨닫게 한다. 몽돌이라는 사물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인 것이다. 불교에서는 ‘모든 사물 속에는 부처의 성질이 들어있다는 진실에 대한 체험을 몽돌을 통해 한 셈이다.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인간 모두를 구원하기 위한 작은 깨달음이 그것이다.
신화규의 수필은 <인연 1>은 불교적 상상력을 통한 인간구원 의식이 적극적이다. 그리고 양미경의 <눈 내리는 날 추사를 만나다>는 폭설에 갇힌 위기의 체험 속에서 추사의 <세한도>가 어떤 구원을 주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수필이다. 여기에서 ‘어떤 구원’이란 미학적 상상력을 통한 인간 구원의식일 것이다. 아래의 인용문이 그것이다.
추사에 비하면 나는 아주 잠시 유배되었을 뿐이다. 얼마 전의 두려움은 실체가 없는 두려움에 불과했다. 피곤한 일상에서 홀로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고, 나는 지금 여유롭고 호사스러운 유배를 즐기고 있다. 한두 시간 후면 다시 부쩍대는 사람 세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나의 일상세계와 가족과도 만날 것이고, 피곤한 세상을 이어가야 한다. 이 자리는 잠깐이지만 요긴한 휴식이다. 외로움을 다독일 수 있고, 아무도 나를 방해할 수 없는…….
잊힌 도시의 귀퉁이에서 고립된 채로 나는 아예 시트를 뒤로 젖히고 누워버렸다. 쌓인 눈이 차창마저 하얗게 덮고 있다. 인생은 하늘이 내린 이승으로의 유배일까. 차창 너머로 송백을 보았던가? 그 사이로 노인 한 분이 어깨의 눈을 털며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다. 내 눈길도 그 뒤를 하염없이 따라가고 있었다.
-양미경의 <눈 내리는 날 추사를 만나다> 결말부분
아름답게 그려진 부분이다. 폭설로부터 구조되어야 할 급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적요 속에 묻혀있는 추사의 <세한도>의 누옥을 떠올린다. 그리고 ≪논어≫의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 (날씨가 차가워진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라는 한 구절에서 추사가 문인화의 제목을 따왔으며 논자의 말과도 만나게 된다. 그런 후 폭설에 갇힌 자신의 처지를 유배로 인식하고 그것은 휴식의 공간으로 인식하고 즐기게 된다. 그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리고 그 상황이 리얼한 상황으로 느껴지지 않고 판타지적인 공간으로 인식된다. 이것이 영상적 요소를 문학의 한 요소로 차용했을 때 갖게 되는 수용미학의 효과이다.
사회의 존경받는 지위나 신분에 이른 출세한 사람의 대다수가 언제 가면이 벗겨질지 모른다는 망상으로 불안해 한다고 들었다. 스스로를 부정하며 참모습이 아닌 이중성에 끊임없이 괴로워하는 것이다.
순자의 인성론에서 제기된 성악설조차 유학의 어느 한 지류에 불과한 것인지, 태어나서 교육을 받고, 도덕적 수양을 쌓고, 후천적으로 인간됨을 습득해 가며 인간 본성을 잃지 말아야 함을 잘 알면서도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본의 아니게 가면 아닌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위에 또 하나의 가면, 닉네임으로 현실과 비현실 세계를 넘나든다.
사람들의 얼굴과 심보에 악착같이 들러붙어 다니는 가면을 확 벗겨버려서, 다시는 못 쓰고 다니게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다.
참 자아 찾기, 양심적으로 살기, 당당해지기, 닉네임 옆에 내 본명 써넣기를 연습하며 살아가다 보면 숨김이 없는 나, 진정한 나로 거듭날까. 가면, 닉네임이라는 이중성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박성희의 <가면, 닉네임> 결말부분
박성희의 <가면, 닉네임>은 인터넷상에서 흔히 사용하게 되는 닉네임에 대한 작가의 유감을 모티브로 해서 문인들의 아호와 자호, 필명, 그리고 나아가서는 탈 혹은 가면을 쓰고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의미를 탐색해 보고, 위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자아 찾기의 진정성을 성찰한 수필이다. 이 수필은 “맨몸, 맨얼굴, 본명, 본마음에는 숨김이 없다.”로 시작된다. 이 말은 투명한 사회 속에서 투명하게 사는 사람들의 참모습의 환기를 통해 위의 인용문의 마지막 단락에서 서술한 ‘진정한 나로의 거듭나기’를 다짐하는 수필이다. “가면, 닉네임이라는 이중성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라는 마지막 문장은 반어적 표현일 것이다.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들며 살아야 하는 오늘, 우리들의 상황을 ‘가면, 닉네임’의 세계로 인식하고 그 속에서의 ‘자유’ 모색은 ‘원초적 순수와 진실’에 대한 모색일 것이다.
남편과 나는 가시밭길의 끝에 서 있다. 이 길 끝에는 분명 희망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가시덤불이 두렵지 않다. 긁히고 갈라져 상처가 덧나도 아무는 것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상처에는 언제나 새살이 돋게 마련이다. 쓰리고 아픈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픈 세월을 견디었기에 그의 발은 성스럽다. 남편은 가끔 낮은 톤의 목소리로 “미안하오!” 하며 내 발을 끌어당긴다. 세상과 부딪치며 미숙한 길을 함께 걸어온 나의 맨발을 씻어준다. 자신의 발보다 더 굳은살이 앉고 건조해진 발을 어루만져 주면서도 아무런 말이 없다.
이불 속으로 들어갔던 남편의 발이 다시 쏙 나온다. 작은 발을 두 손으로 살포시 감싼다. 연습 없는 인생을 걸어오며 매 순간 가슴 졸이며 얼마나 막막했던가. 신산한 세월을 헤쳐온 지금 기쁨도 슬픔도 모든 것은 흘러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랑하게 되면 힘들고 어려운 길도 함께 갈 수 있고, 만신창이가 된 발을 말없이 씻어줄 수도 있다. 죽은 부처님도 평생 길 위에서 맨발로 살다가 열반에 들었고, 예수님도 제자들의 맨발을 씻어주지 않았는가. 어쩌면 우리 모두는 맨발로 와서 세파를 견디다 맨발로 돌아가는 존재들이 아닐는지.
-김희자의 <맨발> 결말부분
김희자의 <맨발>은 가장으로서 힘들게 살아가는 남편의 맨발에 대한 언어적 인식에서부터 남편의 삶을 표상하는 발. 그리고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부처의 발과 예수의 발에 대한 의미까지도 확대하여 그 존재를 환기한다. “맨발이란 바닥에서 시작한다는 뜻이다. 상처 또한 입기 쉬우며 홀로 서는 것이다.”라는 문장은 ‘맨발’의 존재 의미를 감성적이고 사유적으로 표현하고 있고, 삶에 대한 존재양식과 관계양식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남편은 오늘도 탁발승처럼 종일 세상을 헤매다가 들어왔다.”로 시작된 수필 <맨발>은 “어쩌면 우리 모두는 맨발로 와서 세파를 견디다 맨발로 돌아가는 존재들이 아닐는지”라는 문장으로 마무리하는 것으로 보아도 이 수필은 ‘맨발 찬가’ 혹은 맨발이라는 명상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수필에 영상적 요소를 차용한다고 할 때, 이 수필은 다른 성격의 문맥으로 진행될 것이다. 맨발이라는 모티프로 하여 영상모드로 기록한다고 할 때, 그리고 작가와 남편을 등장인물로 할 때 이 수필은 새로운 스토리텔링으로 창작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상에세이는 문학에 영상적 효과를 첨가함으로 해서 비주얼화하는 수필의 한 장르이다. 문학이 영상매체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전략적 창작방법의 한 지표가 될 수도 있다. 즉 인쇄체문학이 첨단 과학의 힘을 빌려 새롭게 태어난 양식이다. 그러나 영상에세이의 새로운 창작 방식이 영상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다는 속단은 시기상조로 보인다. 영상문학은 영상영화시대에서 문학이 폐기처분될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새로운 모색해 보는 노력이 일환일 뿐이지 온전하게 검증된 방식은 아니고 본격적인 창작방법론도 연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영상에세이적인 작품들이 좀 더 많이 나와 영상문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영상 이미지 문화 자체가 혼돈 속에 있는 문학계와 흥행 위주의 작품 양산만을 추구하는 영화계의 현실 판도로 볼 때, 우선 문학과 영화의 학제간 연구에 대한 바른 방향 제시 문제로 균형 있는 상보적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런 믿음을 기반으로 해서 이 글은 계속된다. 문학과 영화는 당대 우리가 살아가는 외적·내적인 모습을 담는 예술 양식이다. 전자가 인쇄매체를 통해서 문화 활동을 전개한다면, 후자는 영상 이미지와 총체적인 테크놀로지를 통해 문화 활동을 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에 따라 이 양자는 영화가 발생하여 발전해 올 때부터 깊은 연관성을 가져왔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의심하지 않는다.
영상문학은 영상화를 전제로 영상을 지향하는 문학이며, 영상화된 문학으로, 영화를 문학텍스트의 확장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영상에세이는 영상화를 지향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영상에세이는 문학의 성격과 영상의 성격을 공유하고 있다. 문자모드가 영상모드로 바뀌는 과정을 통해 그 결과물이 문학외적 독자수용미학에 효율성을 인정받을 때 영상에세이는 설득력을 갖게 될 것이 분명하다.
유한근 --------------------------------------------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으로 등단. 시집 ≪사랑은 흔들리는 행복입니다≫ 외. 평론집 ≪문학의 모방과 모반≫, ≪현대불교문학의 이해≫, ≪한국수필비평≫ 등 다수. 명상언어집 ≪별과 사막≫. 동화집 ≪무지개는 내 친구≫ 등 저서 논문 다수. 만해불교문학상, 한국문학평론가협회상, 신곡문학상 대상, 여산문학상 등 수상. 현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교수. 교무처장, 학생처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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