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동생네 애들하고 우리 애들하고 잠실 롯데월드 민속관에 갔는데, 그 옆에 수필가<금아 피천득 선생님 박물관>이 있어서 들어가 봤답니다. 선생님이 생전에 쓰시던 여러가지 물건들, 침대며 책들 애장품들, 그리고 주요 기사들과 사진, 동상이 있네요... 한가운데 책꽂이에 보니 여러 책들중에 한국문협에서 발행한 2005년도판 <계간 한국수필가>한권이 꽂혀 있네요.. 무심코 책장을 넘기다보니 제 글 <젖을 먹이며>가 발표되어있네요.....그래서 한번 이곳에 옮겨봅니다....
한국문인협회발행- <한국수필가> 2005년 봄호
젖을 먹이며
박 성 희
우리는 꼭 붙어있다.
아기는 엄마 품이 좋고, 엄마는 아기 품이 좋다. 이 순간 우린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없다. 먹고, 자고, 싸는, 본능에만 열중하면 된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고 싶지 않다. 그냥 이대로만 있고 싶다.
엄마는 아기가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아기는 엄마가 제일 믿음직스럽다. 엄마는 아기로 인해 행복하고, 아기는 엄마로 인해 안정을 찾는다. 아기에겐 엄마가 생명줄이고, 엄마에겐 아기가 자신의 일부다.
아기는 단지 엄마 아빠로 인해 생겼고, 엄마 아빠만 믿고 태어났다. 아기는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누군가 책임지고 보살펴주어야만 살 수 있다.
'응애, 응애' 하며 세상이 떠나가도록 울며 태어난 순간을 생각하면 애처롭다. 열 달 내내 뱃속에서 산소와 영양을 공급받으며 잘 지내다가, 갑자기 엄마와 연결된 그 줄이 끊기고 나온 바깥세계는 얼마나 허당이며 허허벌판이고 두려움이었을까.
아기를 낳고 몇 시간 후, 신생아실에서 녀석에게 젖을 물리니 꽉 문다. 어디 갔다 이제 왔느냐며 반가운 눈치다. 집에 와서도 녀석은 제비새끼처럼 입을 쪽 벌리고 젖만 찾는다. 이때 젖꼭지를 대주면 녀석은 꼭 며칠 굶은 사냥개처럼 허겁지겁 도리질을 하며 달려든다. 쭉쭉 빨아 먹는 게 아니라 아예 파먹는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퉁퉁 불었던 젖은 금방 빈 젖이 된다.
아기의 얼굴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없던 속눈썹이 삐죽삐죽 나오고, 흐린 눈썹이 점점 검어지고, 눈빛이 맑아지고 있다. 뱃속에서 미처 만들어지지 못했던 것들이 젖을 먹으면서 계속 생기고 자라는 중이다. 지금 이순간도 키가 크고 살이 붙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든 기관들이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입은 킁킁대며 젖을 켜느라 바쁘고, 고추는 쉭쉭 오줌 누느라 바쁘고, 똥구멍은 뿍뿍 방귀 뀌며 똥 싸느라 바쁘다. 단풍잎 같은 두 손을 폈다 쥐었다 해대고, 곰 발 같은 두 발은 잔뜩 움츠려있다. 갑자기 잠이 와 보챌 때는 박치기로, 주먹질로, 발길질로 난리다. 그냥 놔두었다간 얼굴이 울구락푸르락 해지면서 '으앙, 으앙' 목 터져라 울어버린다.
온몸이 다 아프다. 자궁이 7센티까지 벌어지도록 아비귀환 같던 진통을 이틀간 버티다, 뱃가죽과 자궁을 10센티씩 찢는 난산을 했으니 만신창이가 되었다. 뼈 마디마디가 저릿저릿 쑤신다. 목도 허리도 못 가누는 녀석을 안고 젖을 먹이니 엉덩이마저 헌다. 앉아서 줘도 힘들고, 누워서 줘도 힘들고, 엎드려서 줘도 힘들다. 젖꼭지를 녀석의 입에 조준하는 것조차 힘겹다.
젖꼭지가 작고 뾰족해서인지 아기 입에서 자꾸 미끄러져 빠진다. 그래도 녀석은 1시간씩 물고 있다. 어떤 땐 4시간씩 물기도 한다. 엄마가 어디로 내빼기라도 할까봐서인지 통 놔주질 않는다. 엄마의 팔딱이는 심장소리와 온기를 느끼고 싶고, 스킨십을 통해 애정교류를 하고 싶어서다. 젖은 제 2의 탯줄, 엄마와 다시 하나가 되고 싶은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 부모나 누군가에 품안에서 자란 것이다. 그리곤 성년이 되어서는 혼자 큰 것처럼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부모가 원하는 삶과 원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며 기쁨과 슬픔을 안겨준다.
엄마는 아기에게 평탄한 생을 살아가길 기원하며 젖을 물린다.
아기는 어느 결에 빡빡 깎아준 머리가 빳빳해지고, 통통한 살이 단단해지고, 까르륵 웃고, 침을 질질 흘리며, 손가락을 빨고, 발차기를 하며 논다.
손수건이란 손수건은 죄 물어뜯고, 훌렁 뒤집어 극극 트림을 하고, 뒤로 기어가고, 두 손 두 발 다 들고 '우우, 엄마마마'하며 배밀이 하다, 일어나 앉히라고, 세워 달라고 야단이다.
양쪽 젖은 늘 동시에 샌다. 아기가 배고플 때나 젖줄 때 서로 먼저 먹이겠다고 덤빈다. 물총같이, 분수처럼 솟구친다. 바로 누워 젖을 짜면 천장까지 간다. 아기가 한번 빨고 고개를 돌리면 젖꼭지엔 어김없이 젖 기둥이 생겨 두 갈래 세 갈래 젖줄기가 쭉쭉 뻗쳐 온 얼굴이 젖으로 범벅이 된다. 눈으로, 코로, 귀로, 머리로 젖 세례를 받는다. 녀석은 그 젖을 감당하기 어려워 사레가 들고, 꿈쩍 못한다.
밤중에도 녀석은 수없이 젖을 찾고 빤다. 비몽사몽간에 수유를 하다보면 아침엔 영락없이 하얀 눈곱으로, 코딱지로, 귀지로, 침 흘린 자국이 되어 말라 비틀어져 있다. 머리는 금방 먹을 때 튄 젖이 하얀 이슬이 되어 방울방울 달려 있다.
어쩌다 힘이 들어 한두 번 젖을 못 주면, 돌덩이처럼 딱딱해진 젖이 새서 옷이 푹 젖어 젖물이 뚝뚝 떨어진다. 이럴 땐 젖 못 먹는 아기에게 나눠주고 싶다. 젖은 샘물처럼 빨면 빨수록 나오고, 신선하고, 흡수율이 좋다. 두뇌발달과 발육에 필요한 모든 영양소가 골고루 들어있고, 면역성분이 있어 나이가 들어서도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 엄마가 아기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며 보약이다.
사춘기 때부터 아기를 낳기 전까지 부끄러워 깊숙이 감추어진 젖이, 이젠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내 놓고 있다. 우리아기의 첫 번째 밥이며, 살아갈 힘을 얻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기는 오늘도 두 볼을 오물오물 거리며 젖을 먹는다. 진한 사랑을 먹는다.
2004. 6. 7. (원고지 14매)
피천득선생님과 찰칵~ 오른쪽 앞줄에서 두번째 오렌지색옷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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