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마티니, 나는 오르가즘
박 성 희 수필가
즐거웠다. 오랜만에 비프스테이크를 먹고 와인 한 병을 마셨다. 그리고 우리는 퇴촌을 끼고 양평 강으로 달렸다. 마구 달렸다. 거침없는, 거부할 수 없는 이 자유분방함이 좋았다. 구름은 조롱했고, 바람과 꽃들과 나무들은 비아냥거렸다.
설레었다. 견딜 수 없는 두근거림이었다. 생명력 있는 모든 것들은 아름다움이 극도에 달했고, 에너지는 넘쳐흘렀다. 숨겨진 내 감각을 일깨우며 유혹했다. 감정도 폭풍 쳤다. 꽃단장을 했다. 분홍색 시폰 블라우스를 입고, 리본을 묶었다. 하이힐도 신었다. 또닥또닥 여름 한낮 햇빛 쨍쨍한 거리로 나갔다.
그를 만났다. 전혀 예기치 못한 만남이었다. 그는 폭스바겐을 타고 있었고, 캔디가 좋아하는 테리우스를 닮았으며,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쾌활하게 웃기를 잘하고, 내 말을 잘 들어주었으며, 절대적인 고급스러움과 뿌리치기 힘든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우리는 미끈하게 빠진 하얀 폭스바겐을 타고 어디든 내달렸다. 바람에 그의 생머리가 흩어지자 상큼면서도 세련된 향이 풀풀 풍기며 나를 감쌌다.
카페에 들어갔다. 그는 남자의 술이라 불리는 마티니를, 나에겐 강렬한 감정적 쾌감을 도달케 하는 오르가즘을 주문했다. 칵테일 두 잔이 탁자에 배달됐다. 우리는 술잔에 입맞춤했다. 그의 마티니는 진에 베르무트가 들어가 미묘한 향과 역동적인 맛이 났고, 나의 오르가즘은 보드카와 캐러멜 때문인지 독하면서 은은했고, 따뜻했으며, 달콤했다. 술기운은 농밀하고 내밀하게 다가왔다.
눈을 감았다. 음미했다. 새틴처럼 매끄럽고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게 감기는 듯한. 환희와 절정의 순간이 이런 느낌이었던가. 한 모금씩 마실수록 나는 혼미했고, 흔들렸다. 그리고 더워졌으며, 몽롱했다.
홀 안에는 케니지의 색소폰 연주 ‘쟈스민꽃’이 난분분했다. 유리알 맑은 창 너머 엔 눈부신 여름날 오후의 신비한 빛 속에서 수많은 나비들이 날고 있었다. 꽃과 꿀을 찾아, 사랑을 찾아, 팔랑팔랑 숲속을 헤매고 있었다. 나의 감성은 시간을 초월하고 있었다.
엑스터시였다. 술의 마력 때문인지 모든 것들이 새롭고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야릇한 감정이었다. 이 순간, 그와 나의 만남이 누군가에게 발각되더라도 불륜이거나 죄악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영혼은 고결했고, 언어는 순수했으며, 행동은 당당했으므로. 생명력 넘치는 계절이, 속절없는 세월이, 지나가는 젊음이 안타까워 매혹적인 분위기를 붙잡고 싶었을 뿐. 순간을 사랑하고 싶었을 뿐. 감촉하고 싶었을 뿐.
그리고, 우리는 했다. 뜨겁고 절대적인 키스를. 사랑을. 질투를. 장난을. 술의 이름으로 흠뻑 물들여졌다. 빠져버렸다. 입술과 입술의 닿음. 혀와 혀의 깊은 속삭임으로. 불꽃처럼, 때로는 불폭탄처럼. 그 때마다 그에게선 달콤한, 너무나 달콤한 솜사탕 냄새가 났다. 숨결에서, 말에서, 움직임에서 솜사탕이 나풀댔다.
술 탓이었다. 분위기 탓이었다. 모든 것들에게 조종당했다. 농밀하고 내밀하게 다가왔던 술기운은 일시에 몰려왔다 일시에 몰려갔다. 홀 안은 여전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색소폰 연주가 난분분했고, 창 너머엔 수많은 나비들이 날고 있었다.
한순간 꿈이라고 생각했다. 환상이라고 생각했다. 내 생애 이토록 격정적이고, 찬란한 여름날은 더 이상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순간순간을 붙잡고 싶었고, 나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우리는 다시 달렸다. 바람처럼 내달렸다. 모든 것들이 휙휙 지나갔다. 꿈같았던 시간들이 지나갔다. 내 젊음도 지나갔다. 하늘과 강과 산과 들판, 세상 모든 것들은 아름다운 여름날을 위하여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대지는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붕 떠있었다.
....<에세이스트>2014.7,8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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